큐티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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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느냐고 묻는다면 -빌1;22-30

  • 느헤미야강
  • 2015-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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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03(목) 큐티묵상과 영성일기
 
왜 사느냐고 묻는다면?
1:22-30
 
예수 믿으면 죄사함 받고 영원한 천국에 가게 된다.
이 땅에 사는동안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인내하게 되고 죽어서 영원한 하나님나라에 거하게 된다.
이것이 기독교의 소망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다 해도 교리적으로만 믿으면 행함이 따르지 않는 죽은 믿음이 된다.
십자가의 은혜로 용서함 받았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은 용서하지 못하는 것,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으면서도 염려가 사라지지 않고,
예수님이 동행하심을 소망하면서도 은밀한 죄를 이기지 못하는 것,
이것은 다 문자적으로, 혹은 교리로만 믿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복음을 교리로만 믿으면 천국 소망을 가졌다고 하면서도 죽는 것이 두렵기 마련이다.
나는 예수 믿고 구원받아 천국소망을 가진 자이다.
 
그런데 종종 그런 생각을 한다.
‘누군가 천국이 그렇게 좋은 것이라면 지금 당장 죽어서 천국가지 그래!’
‘그렇게 좋은 곳이면 가 가라고!’
아마도 그렇게 빈정거림을 당하거나 실제로 고민해본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때마다
‘나는 아직 젊으니까? 아이들도 있고 해야 할 일도 많아서 나중에 갈게’ 라고 말하기도 한다.
당연한 말인데 종종 죽음이 두렵고 무서워서 인때도 있다.
 
분명한 것은 살아계신 예수님을 알고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죽는 것이 두렵지 않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말이다.
 
21절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
23절 나는 이 둘 사이에 끼어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훨씬 더 나으나
 
천국은 분명히 있다. 스데반도 보았고, 사도 바울도 직접 가 보았고,
히브리서 기자도 천국에 간 많은 성도들이 우리를 지켜 보고 있다고 했고,
요한계시록 21장에 자세히 묘사되어 나다.
에녹은 천국에 들려 올라갔고, 에스겔도 보았다. 이사야도 보았다.
무엇 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증거이다.
이것이 얼마나 귀한 것이었으면 예수님께서 천국을 소유한 자의 기쁨에 대해서 말씀하셨을까?
마 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보화를 발견한 농부가 얼마나 기뻤을까?
천국을 소유한 자는 이렇게 기쁘다는 것이다.
그래서 죽음 앞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것이 구원받은 모든 성도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천국 소망에도 미혹이 있습니다.
천국이 분명히 있고 그곳은 이 세상 보다 비교할 수 없이 좋은 곳이지만
“나는 죽는 것이 더 좋아, 아, 빨리 천국가고 싶어”
하는 것은 결코 정상적인 신앙이 아니라는 것이다.
 
천국 소망이 분명한 것 같은데 미혹인 것은 현세를 부정하고 염세주의에 빠지는 것이다.
성경에 유명한 하나님의 종들이 빨리 죽고 싶어 했던 기록이 나타나 있다.
엘리야 선지자도 여호와께 “차라리 죽여주십시오.” 하고 기도했던 적이 있었고,
모세도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나로 나의 곤고함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드렸던 적이 있었고,
요나도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라고 기도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셨다. 이 세상이 힘들다고 천국으로 데려가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은 아니기 때문이다.
 
진정한 소망은 “언제 죽나?” 하며 죽는 순간을 기다리며 사는 것이 아이다.
진정한 소망은 천국을 믿지만, 천국가는 것 보다 이 세상에서의 사명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24절 내가 육신으로 남아있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더 필요할 것입니다.
25절 나는 이렇게 확신하기 때문에, 여러분의 발전과 믿음의 기쁨을 더하기 위하여 여러분 모두와 함께 머물러 있어야 할 것으로 압니다.
 
사도 바울은 천국을 소유했지만 이 세상에서 더 살아야 하는 이유를 알았다.
주의 복음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고 교회를 든든히 세우는 것 말이다.
누가복음 9장에 변화산 사건이 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 변화되셔서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하셨던 적이 있었다.
그 모습을 함께 있던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세 제자가 보았다.
그 때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 제자와 산에서 내려오셨다.
산 아래에는 귀신들린 아들과 괴로움 당하는 아버지와 가족이 기다리고 있었다. 주님은 그 아들을 고쳐 주셨다. 이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었다.
 
21절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았던 사람이다.
예수님과 늘 동행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천국을 알고도
고난의 길, 사명의 길을 기쁨을 갈 수 있었다.
 
천국에 가는 것이 더 좋음을 알고도 예수만난 기쁨과 행복이 얼마나 큰지를 알기에
오늘도 한 사람이라도 더 복음의 사람 세우고자 고난, 사명의 길을 걸어간 바울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오늘도 산 아래에 귀신들려 고생하는 아버지와 아들이 있음을 기억한다면
다른 생각,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 레마N뉴마 15-09-04
      저는 30절이 마음에 와 닿았어요.'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제 머리가 조류 아니면 어류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어찌 그리 받은 은혜를 쉽게 잊어 버리는지.... 세상에서 잘 싸우라고 승리하라고 ,  이길 무기를 은혜로 주셨는데  또 똑같은 레파토리의 불만이 나오려는 찰나 우리의 싸움이 혈과육에 관한것이 아니라 정사와 권세와 공중의 권세잡은 자들과의 싸움임을 기억하며 헐거워진 제 가지를 주님께 더 찰싹 달라 붙었답니다.
    • peter 15-09-05
      쫓았다. 룻이 나오미를 따라갈때 사용되었단 말입니다.
      이 말은 딱 붙어있다는 뜻입니다. 딱 달라붙어 있어 둘 사이에 다른 것이 들어갈 수 없는 상태!
      딱 달라붙어 있어 그 사이에 어떤 다른 것이 들어갈 수 있는 틈을 주지 않는것이 제게도 필요한 것임을 깨닫습니다.
      주님과 나 사이에, 말씀과 나 사이에 다른 것이 들어올 수 없도록 해야지...^^